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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밥에 살짝 얹었을 뿐인데... 기가 막힌 맛입니다

SM_SNAIL 2025. 4. 4. 20:08

[여운규의 집밥혼밥] 봄철 바다를 그대로 담은 멍게【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봄은 유난히 쉽게 오지 않는 모양이다. 한동안 예년 기온을 웃도는가 싶더니 3월이 다 가고 4월로 접어드는 길목에 또 한차례 추위가 닥친다. 꽃샘추위라고 퉁치기에는 조금 심한 듯한 초봄의 한파. 꽃 소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꽃 그림자를 채 즐기기도 전에 최악의 산불이 아까운 목숨과 재산을 태워버리는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올 봄은 온다. 제아무리 늦은 추위가 매섭다 할지라도 결국 버티고 인내하는 자에게 봄은 따사로운 손길을 내밀어주기 마련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겨울 끝자락이 비록 답답하고 고달프지만 그럴수록 지치지 말아야 한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은 <새해의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뉘라서 겨울 더러 춥다더냐 /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제 손으로 만들자" 그렇지. 마냥 기다릴 것만은 아니다. 비록 아직은 쌀쌀해도 내 손으로 한번 봄을 만들어 볼 일이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건 봄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제철을 맞은 식재료로 봄맞이하는 것만큼 사람을 기운 나게 하는 일도 드물 것이다.

'봄맞이 음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냉이 달래 쑥 같은 산나물일 것이다. 그러나 봄은 산에만 오는 게 아니다. 바다에도 어김없이 봄은 온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수온이 올라가면 겨우내 사랑받던 방어며 굴 같은 해산물들이 슬슬 물러나고, 바다는 봄의 진객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가 바로 멍게다.

제철 멍게의 알싸한 맛


멍게의 제철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하는 듯하다. 산란기가 끝난 5월부터 초여름까지가 제철이라는 얘기도 있다. 평소 멍게를 워낙 좋아해 별명마저 '명동 멍게'인 나의 절친한 선배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멍게는 6월이나 돼야 먹는 거야."

그렇지만 요즘 양식장에서 나오는 멍게는 3월 말이 되어 훈풍이 불기 시작하면 제법 제맛이 드는 모양이다. 언론 보도를 찾아봐도 대략 이때부터 멍게가 본격 출하된다고 되어 있다. 나 또한 봄맞이 음식으로 멍게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맘때 나오는 멍게는 씨알도 굵고 향도 이미 녹진하다. 한마디로 기가 막힌 봄의 맛이다.

그래서 3월 말이 되면 우리 집은 멍게를 대량 주문한다. 인터넷 클릭 몇 번으로 통영 양식장에서 건져 올려 잘 손질한 멍게 속살을 다음날 바로 받아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비록 현지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먹는 맛에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북쪽 내륙지방에 사는 나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포장을 열면 화사한 주황빛의 멍게 살이 쏟아져 나오면서 바다향이 훅 끼쳐 정신이 아찔해진다. 무슨 다른 걸 하기 전에 먼저 한 움큼 꺼내 살살 씻은 다음 물기만 빼고 바로 먹어본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신선한 멍게의 맛. 한 번 씹을 때마다 특유의 아릿한 향과 감칠맛이 폭발하면서 달고 짠 맛이 느껴지더니 이내 쌉쌀한 뒤끝이 풍미를 더한다. 한 덩이 삼키고 나면 그냥 봄 바다 자체를 머금은 느낌이다.

바닷가 포차 해물 세트를 구성하는 삼총사인 해삼 개불 멍게는 각각 비슷하면서 다른 매력이 있지만, 그중 가장 진한 바다향을 꼽으라면 바로 멍게일 거다. 처음 먹는 사람들에겐 그냥 바닷물을 그대로 떠먹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데, 이해가 되는 부분이 없진 않다.

멍게를 먹는 나라는 몇 안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가장 많이 먹고,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 먹는 정도라고. 그만큼 호불호가 있는 맛이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찌 이 맛을 모르고 살 일인가 싶기도 하다.


회로 먹을 멍게를 일부 덜어두고 나머지는 잘게 썰어 멍게젓 담글 준비를 한다. 씻어서 잘게 썬 멍게는 소금을 살짝 뿌려 절이고 소쿠리에 1시간 정도 받쳐 물기를 잘 뺀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원래 멍게의 짠맛이 있기 때문에 염도 조절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둘째, 물기 빼느라 받쳐둔 멍게를 자꾸 주워 먹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거다. 맛있다고 하나둘 먹다 보면 나중엔 젓 담글 멍게가 모자라게 된다.

물기를 다 뺀 멍게를 큰 그릇에 담고 쪽파, 양파, 마늘, 청양고추를 잘게 다져 넣은 다음 고춧가루 3, 액젓 1, 설탕 0.5의 비율에 통깨 넉넉히 넣고 버무려 양념하면 끝이다. 이렇게 만든 멍게젓은 냉장고에 하루 정도 숙성하면 그때부터 제맛을 낸다. 밥반찬으로 먹어도 좋고 생채소와 함께 밥에 올려 비빔밥을 만들면 최고다. 술안주로야 더 말해 뭣할까.

우리가 알던 세상이 사라지기 전에

얼마 전, 안타까운 뉴스를 접했다. 이상 수온으로 인해 멍게 양식장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다. 너무 더웠던 지난여름, 수온이 지나치게 상승해 멍게 속살이 다 터져버렸다고 했다. 이제 수확 철이 되었지만 건져 올릴 멍게가 없다는 것. 전국 멍게 유통량의 70%를 차지하는 통영 거제 근처 양식장의 폐사율이 90%를 넘는다는 소식에 나는 봄을 잃어버린 것처럼 안타까웠다.

내가 이렇게 안타까운데 어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 갈 것인가. 걱정되는 마음에 통영에서 활멍게를 공급해 주시는 '이순신 수산' 사장님께 상황이 어떤지 여쭤봤다. 사장님 역시 직접 운영하는 양식장의 멍게가 대부분 폐사되는 피해를 막지는 못했다고 하신다. 아직 공급에 큰 문제는 없지만 앞으로 수요가 더 늘어나면 준비된 물량이 빠르게 소진될 우려도 있어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당장 큰 문제는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이제 멍게 한 접시 먹는 일도 큰 사치가 될지 모르겠다. 멍게 없는 봄이라니. 상상만 해도 싫다. 기후 위기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낯설고도 두렵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한탄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꼭 멍게 얘기만은 아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나서서 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468456?cds=news_media_pc&type=edi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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