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PICK 안내야금이와 호두, 그리고 우리 본문
그림책 펼치는 마음] 호두와 사람

야금이의 임보 경험 이후 묘연을 맺은 말순이. 당뇨를 앓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특징이 있지만, 씩씩한 열네 살 고양이다. 자기주장이 또렷하면서도 언제나 반려 집사에게 너그러운 수용을 베풀어준다. (촬영: 안지혜)
나의 집에 맨 처음 초대받은 고양이는 성이 ‘가’요, 이름은 ‘야금’이었다. 그의 집사들은 자매였는데, 두 사람은 야금이의 소리가 가야금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다. 파랗고 노란 눈을 가진 하얀 털 고양이는 나와 1년을 살 계획으로 우리집에 왔다. 당시만 해도 고양이가 낯설었던 내가 임보(임시보호)를 결정한 것은, 고양이 셋과 살며 길고양이들을 챙기던 회사 선배가 절박하게 권했기 때문이다.
“야금이를 보다가 어려운 게 있으면 무엇이든 다 도와줄게.”
그렇게 어느 늦은 저녁, 야금이는 몇 개의 물건과 밥,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내게로 왔다. 편지에는 야금이의 나이와 성격, 특징, 동거 시 주의사항이 연필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내게 야금이 임보를 부탁했던 선배는 정작 야금이의 집사 자매들과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라인 상에서 서로의 애묘 일기를 읽어온 ‘블로그 이웃’이라고 했다. SNS에 올라오는 길고양이 학대 사건에 함께 분노하고 구조활동에 기부금이나 물건을 보내고, 시간과 몸을 써 가며 연대 활동을 해온 동지이기도 했다. 나는 사실 고양이 자체보다 그 선배를 통해 봐온 고양이 구조자들의 활동과 이들이 인연을 맺는 방식이 더 흥미로웠다.
야금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고양이 꼬리도 볼 수 없었다. 줄어든 밥과 생겨난 똥을 보며, 집 어딘가에 낯선 생명체가 깃든 것을 알아차릴 뿐이었다.
“이상하네. 흰 봉다리만 봐도 생각날 텐데…….”
선배에게 야금이 상태를 이야기하며 야금이 집사들에게서 별 연락이 없었다고 하자, 선배는 의아해했다.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 사이에는 고양이가 새집에 적응할 때까지 날마다 밥 잘 먹었는지, 똥 잘 눴는지 묻고, 고양이 사진 보내주는 게 보통인데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고양이 보내고 긴장 풀려서 어디 아픈가.”
야금이와의 동거 3일이 되던 밤, 내게 빼곡한 편지를 써서 보냈던 언니 집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금이가 처음으로 내게 모습을 드러내던 밤이었다. 야금이는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그녀의 죽음에 대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너네 언니가 하늘 나라로 가셨대.”
내외하듯 나를 피하고만 있던 야금이가 다가왔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두 발로 섰다가 앉았다가 하다가 가만히 내 옆에 앉았다.

그림책 『호두와 사람』(조원희 글·그림. 사계절, 2024)은 호두가 작가에게 오기까지 겪은 1년 4개월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야금이과 호두
그림책 『호두와 사람』(조원희 글·그림. 사계절, 2024)을 보며 야금이의 집사 자매들과, 야금이를 나에게 연결시켜준 선배가 떠올랐다. 이 책은 보호소에서 죽을 위기에 놓였던 개 ‘호두’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구조되고, 마침내 한 사람의 반려견이 되기까지 과정이 담겨 있다. 조원희 작가와 작가의 개 ‘호두’의 실제 이야기이다. 호두가 작가에게 오기까지 겪은 1년 4개월간의 과정을 담담히 담았다.
이 책의 특이점은 호두의 이미지다. 호두는 꼬리를 살랑거리거나 귀를 쫑긋거리지 않는다. 턱이 복슬거리거나 사람 앞에서 발라당 누워 애교를 부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호두도 가끔 햇살이 좋은 날은 킁킁거리고 귀엽게 꼬리를 흔들고 팔짝팔짝 뛰며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는 호두의 그런 모습이 담겨 있지 않다. 아주 단순한 선으로, 호두가 한 명의 ‘개’라는 것만을 또렷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개를 여러 사람이 구한다. 그 중 한 사람이 호두에게 일러준다.
“잊지 마, 호두야. 모든 순간에 사람이 있었어.”
조원희 작가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게 아닌 계속 연결되는 흐름으로 보였으면 해서 각자의 에피소드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고르게 분배”했다고,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들려준다. “처음엔 호두 캐릭터를 중심으로 잡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사람들의 연결, 연대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어요.” 그래서 “캐릭터의 흐름도 담담하고 튀지 않는 방향으로 수정”했고, 단순화한 선과 약간의 색, 가는 펜을 써서 그림을 표현했다고. 작가는 “원래 좀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 이 지점 때문일까. 『호두와 사람』은 대상과 밀착되지 않고 거리를 둔 시점에서 기승전결 서사 또는 반복, 점층 후 반전을 주는 구성의 맛이 어우러져, 어떤 강렬함이 전해진다.
사람의 자리

조원희 작가의 그림책 『호두와 사람』에 실린 장면들. (출처-사계절 출판사)
이 책은 민주인권그림책 시리즈(2022년부터 민주화운동기념관 개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사계절출판사가 발간한 논픽션 그림책 시리즈) 8권 가운데 한 권이다. ‘호두’로 대변되는 약자의 고난을, 시민들이 연대의 과정을 통해 극복한 것으로 담아냈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개인 한 명 한 명의 선한 동기와 의지에 감동했다. 거기 어디쯤에서 나를 동일시하고, 안심과 위안을 받았기에 이 책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나 역시 내 고양이에게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은 부정어라기보다는 긍정어이다. “네가 죽을 뻔했어.”라거나 “사람 세상이 참 흉하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말 대신 “살아 남아줘서 고마워. 너를 살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네 곁에 있어.”라는 희망과 닮은 얘기들.
그런데 지금 맞이한 내란의 봄, 극우 파시즘이 전세계에 확산되는 불안한 시절, 다시 읽은 『호두와 사람』이 주는 위로와 감동에 약간 복잡한 마음이 생겼다. 최근 산불 현장에서 희생된 가늠할 수 없는 수의 야생동물과, 대피할 곳이 없었던 반려동물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 우리는, 인간은, 세계는 어째서 이런 세상을 만들어온 것일까. 우리는 정말 작은 성취와 구조를 이뤄온 것일까. 호두의 고난이 여러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해결되는 이 헤피엔딩은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전하는가?
지난 2월, 나는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서 한 달간 열린 [그림책 비평 모임: ‘알아차림’의 읽기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이 책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호두와 사람』이 주는 감동과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모임을 이끈 한윤아 비평가는 『호두와 사람』의 이야기가, 최근 현대사를 다룬 영화 등에서 보여주는 ‘민주화 서사’의 관습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것은 “모든 역사적 순간에 작은 용기를 가진 소시민이 있었다, 그들이 모두 역사의 주인공이다.”라는 관점이다. 한편으로는 “개가 ‘구조의 대상’이라는 맥락이 전제되어 있고, 개와 사람의 새로운 관계성을 보여주는 면은 약하다”라며 “인간 중심의 서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평도 덧붙였다.
조원희 작가의 그림책은 약자의 어떤 현상이 담긴 서사를, 약간의 거리를 둔 건조한 자리에서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감정을 왈칵 건드리는 힘이 있다. 그 왈칵 건드려지는 감정 속에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현실 세계에서 놓인 이 책의 자리, 동물의 자리, 사람의 자리 배치인지도 모르겠다.
십육년 전, 1년 동안 나와 살기로 했던 야금이는 다행히 6개월 만에 동생 집사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또 다른 흰 고양이 말순이의 집사가 되었고, 성실하고 다정한 사랑을 아직도 부지런히 배워가고 있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7/0000007892?cds=news_media_pc&type=edi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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