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웰니스
장기기증, 설득 안 한다"는데도 '독보적 1위'... 스페인 비결은 본문
[신은별의 별의별 유럽: 시즌 2]
(16) 스페인의 장기기증
편집자주
우리가 알아야 할, 알아두면 도움이 될, 알수록 재미있는 유럽의 이야기를 신은별 유럽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뇌사 장기기증에 관한 한 스페인은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약 5%의 장기기증이 스페인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이미지는 스페인에서 장기기증이 이뤄지고 있는 장면을 한 것. 챗GPT로 생성
"장기기증 분야에서 스페인은 세계적 엘리트입니다!" (지난 3월 스페인 보건부 보도자료)
"스페인은 장기기증 분야의 선두주자라는 건 새삼스럽지 않아요." (지난 1월 모니카 가르시아 스페인 보건부 장관)
보도자료나 기자회견을 통해 정책 성과를 홍보하는 것은 어느 정부든 마찬가지지만, 장기기증 정책에 관한 스페인 정부의 자부심은 특히 더 커 보인다.
이유가 있다. 뇌사 장기기증에 관한 한, 모든 숫자가 스페인이 '엘리트'이자 '선두주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지난해 스페인은 인구 100만 명당 뇌사 장기기증자 수(PMP)에서 52.6명을 기록했다. 유럽연합(EU) 평균(22.9명·2023년 기준)보다 2배 이상 많다. 스페인 인구는 EU의 약 11%인데 장기기증으로는 23%나 차지한다. 전 세계 장기기증 약 5%가 스페인에서 이뤄질 정도다.
인구가 5,000만 명 안팎으로 비슷한 한국과 비교하면 스페인에서 얼마나 많은 장기기증이 이뤄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따르면 한국은 한 해 400건대 장기기증이 이뤄진다. 반면 스페인에서 지난해 이뤄진 장기기증은 무려 2,562건에 달했다.
비결이 뭘까. 한국일보가 스페인 마드리드 등에서 스페인 장기이식 업무를 총괄하는 '국가이식기구(ONT)', 장기이식을 수행하는 '푸에르타 히에로 마하다혼다 대학병원', 장기이식 관련 비영리기구 '기증 및 이식 연구소(DTI)' 등에 소속된 전문가 7인을 만나 파악해봤다.
옵트아웃이 능사? "단언컨대 아니다!"
스페인 밖에서는 스페인의 장기기증이 활발한 이유로 '옵트아웃(Opt-out)'을 자주 거론한다. 이는 '개인이 명확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을 잠재적 장기기증 대상자로 분류한다'는 뜻이다. 장기기증 대상자가 되려면 별도의 신청 절차를 밟도록 하는 '옵트인(Opt-in)'보다 장기기증이 많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제도적 틀이 높은 장기기증 참여를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옵트인 방식을 따른다.
그러나 현지 전문가들은 정작 옵트아웃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30년 이상 장기이식 분야에서 일해온 DTI 회장 마르티 마냐리치는 심지어 "옵트아웃 제도가 미치는 영향은 '제로(0)'"라고 말했다. 옵트아웃 제도가 있다 해도 스페인에서 뇌사 판정을 받은 사람의 장기는 자동으로 기증되지 않는다. 최종 실행을 위해서는 해당 환자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 결국 가족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스페인에 있다는 뜻이다.
"기증자 가장 가까운 곳에... '그'가 있다"
전문가들은 일제히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이하 코디네이터)를 비결로 꼽았다. 코디네이터는 기증부터 수혜에 이르는 과정을 중재·조정하는 역할로,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서도 결코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통상 뇌사 추정자 발굴 및 신고 접수, 뇌사 판정 과정의 조정 및 뇌사자 평가 및 관리, 장기 구득, 유족에 대한 사후 지원 등을 수행한다.

스페인 푸에르타 히에로 마하다혼다 대학병원에서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로 근무하는 데이비드 우루뉴엘라(왼쪽)와 마리나 페레즈 레돈도가 1일 병원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마하다혼다(스페인)=신은별 특파원
그러나 스페인 코디네이터는 △장기기증을 담당하는 별도 기관이 아니라 병원에서, △중환자실 소속으로 근무하며 △100% 의료진(의사·간호사)이라는 점이 다른 국가와 큰 차이점이다. 이는 장기기증 기회를 포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2017년부터 ONT를 이끈 베아트리스 도밍게스-길 곤잘레스 이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잠재적인 장기기증자(뇌사자 또는 뇌사 추정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코디네이터가 존재해야 어느 시점에, 어떤 조치와 결정이 취해져야 하는지를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장기기증에 동참하기를 원해도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무엇보다 일면식 없는 누군가가 장기기증을 안내하면 이를 받아들이는 가족들로서는 거부감이 들 수 있는데 환자를 가까이에서 살피던 이들이 이를 진행할 경우 그런 감정이 들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 현재 스페인에는 716명의 코디네이터(의사 453명·간호사 263명)가 있는데 이들은 '의사+간호사'로 팀을 이뤄 전국 185개 병원에서 근무한다.
중환자실 소속 의사들도 이들의 존재를 반긴다. 장기기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고 때로 환자 측과의 가교 역할을 수행할 기회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푸에르타 히에로 마하다혼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의사 사라 알칸타라 카르모나는 "나는 코디네이터가 아니지만 생각이나 태도는 코디네이터나 다름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최우선 목표는 환자 건강 회복이지만 불행히도 이를 언제나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기증은 환자 및 환자 가족에게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코디네이터들을 워낙 가까이에서 보기 때문에 이러한 기회에 환자 및 환자 가족이 노출될 방안을 자연스럽게 고민하곤 한다. 때로 환자 및 가족들로부터 '장기기증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고 코디네이터들과 연결해 주기도 한다. 서로 다른 부서였다면 이러한 소통이 원활하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카르모나 책상 바로 옆에는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의사 마리나 페레즈 레돈도 좌석이 있을 정도로 코디네이터팀과 비(非)코디네이터팀은 활발하게 교류한다.
"가장 힘든 시기, 코디네이터는 '친구'가 된다"
스페인 코디네이터가 다른 나라보다 특별한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기증부터 수혜에 이르는 과정을 중재·조정하는 건 똑같지만, 특정 환자가 잠재적 장기기증 대상자로 분류되는 순간부터 해당 환자 가족과 '초밀착'해 돕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때 밀착이란 장기기증에 동의하라는 권유나 설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푸에르타 히에로 마하다혼다 대학병원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간호사 데이비드 우루뉴엘라는 "가족들이 애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재적 장기기증자가 식별되면 그 가족과 인터뷰를 한다. 상당 시간 동안 우리는 그들의 사연과 감정을 듣는다. 문제 해결도 우리 몫이다. 장례 방식을 고민하면 상담사와 연결해주고 장례식장을 찾아봐주기도 한다. 불의의 사고 등으로 사망해 부검 또는 수사가 필요하면 서류 업무도 대신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친구'로 불린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는 이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쌓인다. 장기기증을 설득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참여에 응하는 이유다."
이들의 업무는 때로 병원 밖에서도 진행된다. 우루뉴엘라와 레돈도는 "죽음을 앞둔 스무 살 여성이 장기기증 결정 전 관련 정보를 얻고 싶다고 알려와 가정 방문을 한 적이 있다"며 "궁금증이 빼곡하게 정리된 노트를 보며 꼼꼼히 묻는 그에게 성심껏 안내했고, 그 모습을 보며 가족들도 장기기증에 대한 신뢰를 얻었다"고 말했다.
"현장 더 잘 굴러가게"… '작은 본부'의 힘
본부인 ONT는 절대 현장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코디네이터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두고 있다. ONT는 장기이식과 관련한 모든 관계자 간 소통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1989년 설립됐다. ONT 본부 소속 인원은 50명 정도다.

스페인 마드리드 국가이식기구(ONT)에서 1일 만난 마르티네즈 알푸엔테 매니저가 장기기증 코디네이터 교육 등 ONT의 업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드리드=신은별 특파원
코디네이터 교육은 ONT의 핵심 업무다. 마냐리치 회장은 "ONT는 코디네이터가 가족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등과 같은 교육에 특별히 중점을 두고 있다"며 "다른 국가가 대중에 대한 장기기증 캠페인 등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하는 반면 스페인은 현장에 대한 투자가 장기기증에 대한 국민적 신뢰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ONT 교육 담당자인 마르티네즈 알푸엔테 매니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있는 이에게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은 무엇일까?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환자 가족과 소통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ONT는 코디네이터 개개인이 마주하는 고충에 대한 조언을 할 때도 많다. 마르티네즈 매니저는 "가족마다 사연이 다르고 저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니 이들을 대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야 한다"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시나리오'는 계속 쌓이는데 이를 숙지함으로써 코디네이터들은 꾸준히 발전해 간다"고 말했다. 물론 공정한 장기 배분, 빠르고 안전한 운송 등을 잘 해내는 건 ONT에 부여된 기본 임무다. 베아트리스 이사는 "장기기증 비율을 높인 데는 공공 성격이 강한 스페인 의료 체계, 중앙집권적 의사 결정 구조 등 여러 요인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페인에서 장기이식 과정을 총괄하는 국가이식기구(ONT)의 베아트리스 도밍게스-길 곤잘레스 이사가 1일 마드리드에 위치한 본부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마드리드=신은별 특파원
이러한 스페인 모델이 다른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모두 "그렇다"고 말했다. 베아트리스 이사는 "스페인 모델은 이미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여러 국가에 전면·부분적으로 도입됐다"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건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지금처럼 두터워지기까지 수십 년간 현장에서 '작은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왔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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