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웰니스
벽방산에 울리는 아버지의 초혼가 [마운틴 소설 벽방산] 본문
*소설 형식의 산행기이며, 사실이 아닌 허구입니다. 출연자는 조벽래(동아대산악회OB)·조현세(동아대산악회YB)씨입니다.

"그만 좀 해요. 이런 산행 이제 넌더리나요."
긁힌 손등에선 피가 나고, 바지에는 부러진 나뭇가지가 다닥다닥 걸려 있었다. 경남 통영에서 보기 드문 영하의 날씨였지만, 현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숨은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면서도, 으르렁거리는 이리처럼 분노를 토했다.
살기는 없었다. 참을 만큼 참았던 것이 터져 나왔으나, 항변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현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유능한 사업가이자, 해마다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는 동네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1시간째 가파른 돌길과 수풀을 헤치고 있었다.
"곧게 솟은 것이 얼마나 독특한지 아니? 분명 이 근처에 있어."
아버지와 한 번 산행한 사람은 다시는 같이 가지 않는다. 남들과 다른 산행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것을 찾기 전에는 물러설 기미가 없다. "혼자 산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쩌냐, 아들인 네가 따라 가야지"하는 어머니 말에 아버지를 따라 나선 그는 오늘도 갔던 길을 되돌아오길 세 번째다. 갔다가 돌아오고, 저리 갔다가 돌아오고, 남은 산행 거리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여정은 산행이 아닌 고행이다.
모처럼 걸음을 멈춘 아버지는 보온병을 꺼내 보리차를 따라 주며, 하늘을 가리켰다. 손을 뻗으면 베일 것 같은 차가운 파란 물감 속을 새가 날고 있었다. 날갯짓 없는 우아한 비행, 독수리는 아닐 것이고, 매나 수리일 것 같았다.
"매가 그냥 나는 게 아냐. 공기가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지니?"
"찬바람만 부는데요."
"매의 학명은 팔코 페레그리누스Falco peregrinus, 방랑자라는 뜻이야. 옛날 몽골에선 머리 위에 맴도는 매를 한이 있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방랑자의 영혼이라 믿기도 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매를 보고 있으면 느리고 우아한 비행 탓인지 정신이 몽롱해졌다. 3초 같은 3분이 흐르고, 호흡은 정돈되고, 손등의 상처는 딱지가 생겼고, 땀은 말라 있었다. 이렇게 바람이 거센데 어떻게 저리도 안정감 있게 나는지, 펄럭거리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나와 반대되는 존재인 게 분명하다.
비행만으로 벽방산이 고요해졌다. 갈피를 못 잡는 내 마음은 언제쯤 매가 될 수 있을까. 오늘도 빠른 하산은 글렀음을 직감하고, 매에게 잡힌 참새처럼 아버지를 따랐다.
1년에 4일이다. 아버지는 365일 중 4일은 광인狂人이 된다. 1월 13일, 4월 6일, 7월 28일, 11월 2일. 매년 같은 날 기이한 산행을 한다. 1시간 넘게 타고 오는 차 안에서도, 산행을 시작하고서도 말이 없던 아버지는, 정상에 올라서야 봇물 터진 듯 쏟아냈다. 다른 세상 언어인양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세 번째 바위 넘어지면 성인이 나온다
벽방산은 푸를 '벽碧'에 꽃다울 '방芳'자를 쓴다. '푸르고 꽃다운 산'이란 순진한 뜻, 그 이상이 깃들어 있다. 불가에서는 예부터 벽발산碧鉢山이라 부르는데, 석가모니의 제자인 가섭존자가 식사할 때 쓰는 밥그릇을 들고 미래에 올 미륵부처를 기다리는 모습의 산이라는 것.
낙남정맥 대곡산에서 성스러운 산줄기가 뻗어 나와 통영 앞바다로 달려간다. 이 산줄기가 통영지맥이고, 벽방산(651m)은 이 산줄기의 최고봉이자, 맹주이다. 바다에서 끝을 맺는 것 같지만 통영대교 건너편의 미륵산(458m)이 미래의 미륵부처를 뜻한다는 것. 통영대교가 지나는 바다는 현실과 미래를 가르는 틈이며, 벽방산을 올라 그 바위를 찾는 것은 과거의 그를 추억하고 미래에 올 그를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

산 입구의 안정사安靜寺는 가섭존자가 되고자 했고, 미래의 부처가 되고자 했던 이들이 1,000년 넘게 수행했던 절이다. 신라 무열왕 1년(654) 원효대사가 처음 지었다. 신라시대에는 1,000여 명이 수도했던 굴지의 사찰이다. 보물로 지정된 종과 그림, 조선왕실에서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관리하도록 한 금송패가 유명하지만, 은봉성석隱鳳聖石말고는 관심 없다.
벽방산에는 세 개의 '선바위'가 있는데, 첫 번째 바위가 넘어지면서 해월 스님이 해탈했고, 두 번째 바위가 넘어지면서 종열 스님이 득도했으며, 마지막 선바위인 은봉성석이 남았다. 앞으로 나타날 성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안정사가 거느린 암자 중 하나인 은봉암에 은봉성석과 안내판이 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진짜 '선바위'는 다른 곳에 있다고 했다. 오늘, 벽방산 정상에 올라서야 "선바위를 찾으러 왔다"고 일러준다.

엉뚱하기 짝이 없지만, 굳이 큰 도서관을 찾아 옛 문헌을 뒤질 정도로 치밀했기에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동했다. 어쩌면 가족이기에, 조금은 정상인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거제도와 통영시, 고성군을 통틀어 최고 높이인 벽방산 정상은 외로웠다. 저 많은 산과 바다가 멈춰 있다. 살아 있는 건 나뿐이다. 풍경이 영혼을 휘감아 몸도 마음도 아득해졌다. 아버지도 잠깐 잊었다.
정상에서 안정재로 이르는 능선을 한창 뒤졌으나 선바위는 없었다. 옛 암자 터였다는 대나무숲을 헤치고, 돌탑이 있는 비탈을 아슬아슬하게 누볐다. 돌탑은 고성읍 정동마을의 박영배씨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간 쌓았다고 한다. 진안 마이산 돌탑을 보고 와서 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는 기인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선이 고도를 확 낮추는 안정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산비탈을 올라오자, 화가 치밀었다. 갔다 온 길을 되돌아가면 오르막이 두 배로 힘든 탓이다. 헛수고를 한다는 무의식 때문인지, 평소 체력에 비해 숨이 차고, 온 근육이 아우성을 쳤다. 아버지는 인터넷 블로그에 실린 산행기의 바위 사진을 프린트해서 한 달 전부터 책상에 붙여놓고 뚫어지게 쳐다 보고 있곤 했다. 결국 못 찾는 건가 싶어 안타깝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긴 한 시간 전에 갔던 능선이잖아요."
"사진 배경을 보면, 이 각도가 분명해. 너무 빨리 되돌아왔어, 다시 끝까지 가보자."
질린다. 정말. 끝을 볼 작정인지 서두르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왔던 길을 다시 가는 아버지의 어깨는 어떤 책임감으로 가득하다. 무엇이 이토록 비상식적인 산행을 하게 하는 걸까. 검게 우거진 짙은 숲에서 언제든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아버지의 비밀. 그러고 보면 가족 누구도 까닭을 물어본 적 없다. 막상 아버지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펄떡이는 검은 생물의 정체를 똑바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족이기에 침묵하는 것이 있다.
20분쯤 내려왔을까. 이번에도 등산로를 벗어난다. 산길을 벗어나면 그야말로 한 발 내딛기가 어렵다. 위태롭기까지 한 수 십 미터 벼랑. 행여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혼자 보낼 수 없다. 바다 바람이 헤비메탈 같은 소리를 내며 위협한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긴 한데, 짐승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 거긴 너무 위험해요. 그만 돌아가요"라고 하려는 찰나, 바위를 넘어서, "찾았다"하는 외침. 포기를 모르는 아버지는 기어코 위태로운 길을 넘어 숨은 선바위를 찾았다. 기쁘지는 않았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정말 특이한 바위였다. 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린 것마냥 솟은 바위. 일어선 바위, '선바위'였다. 인디언 전통 의식인양 바위를 빙빙 돌았다. 정지 화면인양 서서 바라보고, 손을 얹고선 눈을 감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진중함이 안개처럼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 화살촉 같은 바람이 살갗을 뚫어 놓을 것만 같다. 버프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리고 재킷의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아버지는 그 사이에 상을 차렸다. 바위 앞에 흰 천을 깔고, 언제 준비했는지 대충 여덟 가지 되는 음식을 놓았다. 소주랑 막걸리, 사이다를 꺼내어 몇 번 잔을 올렸다가 비웠다. 제사처럼 두 번 절을 하더니,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의식이 끝났는지, "현세야, 먹어"라고 한마디했다. 부자父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들은 하품 하느라 눈물이 났고, 아버지의 눈물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소주, 막걸리, 사이다, 음료를 왜 세 가지나 가져 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행에 가까운 행동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만, 때가 되면 말을 할 것이다. 멀리 통영 앞바다가 햇살에 반짝이고 흘러내린 능선이 아름다웠으나, 소주와 막걸리 냄새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울지 않는 매를 따라 매바위로 갔다
두 번 오르내린 능선을 참아내며 다시 올랐다. 주능선을 지나 안정재에서 이제야 하산하나 싶은데 아버지는 "천개산 지나 매바위까지 가자"고 한다.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보니 2시간 넘게 가야 할 거리다. 해 지기 전에 하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곳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는 또 어떻게 가지러 오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런 걸 따질 분이 아니다.

하산길과 오르막길의 갈림길에서 발을 떼지 못하자, 아버지는 "달래야 할 혼이 있다"고 말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박수무당이라도 될 참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몸은 이미 오르막을 걷고 있었다.
푹신한 흙길이 다독이듯 천개산(521m)으로 이끌었다.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운 연서戀書처럼 둥근 산이 지나갔다. 산인지, 봉우리인지, 언덕인지 모호한 산길을 밟았다. 지금껏 내 삶도 모호해서 이 길이 맞는지, 좋아하는지,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산도 봉우리도, 언덕도 아닌 깔딱고개만 있어, 그냥 헉헉 거리며 여기까지 왔다. "아버지처럼만 살아라"는 말에 짓눌려 내 마음을 보지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
암자에서 보면 숲 사이로 하늘만 빼꼼 보여서 하늘 천天자에 열릴 개開자를 쓰는 암자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흩어진 1,000개의 질문과 마음을 자루에 쓸어 담고, 통신사 기지국 철탑이 있는 천개산을 지나 노산재로 향한다. '준·희' 표지기가 있는 대당산을 지나 낮은 산등성이를 쓸어 담는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가다 기다린다. 열리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다린다. 미래의 부처를 만나러 미륵산을 가는 길이었다면, 통영지맥을 따랐어야 하지만 매바위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대학산악부에 들어가라고 권유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더 아쉬웠다. 죽어도 괜찮다. 그것이 대학산악부 회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다.
어차피 로프가 있어 추락해도 죽지 않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니기에, 그래도 괜찮다고 마음 먹자 벽에서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사람들은 날더러 "겁이 없다"고 했지만, 겁이란 지극히 살고 싶을 때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살아 움직이는 빈집이었다. 자유로운 빈집이었다.
빈 능선이 아니었다. 철계단을 올라서자 은갈치와 산낙지가 풍경으로 다가왔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와 소나무의 초록이 무성한 산마루 무리.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외진 산줄기에서, 예상치 못한 광경에 와락 "미안하다"고 읊조렸다.

시골 야산인줄 알았던 산줄기에서 걸출한 바위봉우리를 몇 개나 만났다. 이곳 사람들은 바위 꼭대기 풍경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 철계단을 세심하게 놓았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원점회귀할 수 없는 긴 능선에는 아무도 없다. 회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삶을 원했으나 언제나 그 경계에서 아버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기 이대로 1분만 앉아 있으면 귀가 얼어서 떨어질 것 같았다. 아버지는 두툼한 넥워머를 씌워 주며, "매바위가 멀지 않다"고 했다.

다시 철계단을 오르자 마당바위가 있는 매바위였다. 좌진마을이며 창포마을 앞바다가 손바닥 만하게 보였다.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산을 지키고 있었다. 문득 아버지는 배낭 안에서 낡은 재킷을 한 벌 꺼내 흔들고, 닳아빠진 장갑과 손수건도 꺼내 세 번씩 흔들었다. 흔들 때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영규야! 재삼아! 규만아!"
망자의 유품을 흔들면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초혼 의식이란 건 알고 있었다. 죽은 이를 다시 살리려는 전통 의식 아닌가. 한동안 말없이 유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버지는 "1999년 겨울이었다"고 입을 열었다.
"겨울 바다를 보러가자던 친구들을 억지로 설득해 설악산에 데려갔다. 산을 오른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 눈이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졌다. 계속 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공룡 보여 준다며?'하는 친구들의 장난기 섞인 말이 맴돌았다. 주구장창 산으로 쏘다닌 나를 아는 친구들은 날씨를 판단할 산행 경험이 없었다.
공룡능선을 반쯤 왔을 때, 재삼이 이빨을 부딪칠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저체온증 증상이었지만, 공룡능선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희운각대피소까지만 어떻게든 가보려 했지만, 눈보라에 속도가 터무니없이 느려졌다. 영규는 한 번 앉더니 꾸벅꾸벅 졸았다. 조금만 쉬자고 한 것이 20분째였다. 벌써 해가 기울어 어둑해지고 있었다. 규만이 다른 친구들과 남고, 나 혼자 구조를 요청하러 희운각대피소로 갔다. 넘어지고 뒹굴다시피 하며 산길을 달렸다. 금방 어두워졌고, 산길이 아닌 곳을 헤집고 갔다가 되돌아오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저녁 8시가 넘어 옷이 찢기고 생채기가 난 채 대피소에 닿았다. 119와 국립공원 직원들이 곧 구조하러 갈 테니 위치만 알려주고, 나는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선발대가 먼저 출동하고, 설악동에서 후발 구조대가 올 터이니 잠깐만 휴식을 취하고 후발대와 함께 오라고 했다. 거절하기엔 내 몸 상태가 온전치 않았다.
끓여 준 라면과 초코바를 먹고, 잠깐 몸을 녹이려 담요를 덮고 누웠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 이때 꾼 꿈이 생생했다. 친구들이 한 명씩 바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외쳤지만 나만 두고 곧게 선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같이 가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 뜨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바람을 피하려 등산로를 벗어나 바위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친구들은 숨을 거둔 채 아침에 발견되었다. 나는 울 자격이 없었다. 그들이 한없이 떠도는 원혼이 될까봐 기일과 생일이면 꿈에서 본 바위를 찾아 잘못을 빌었다. 친구들이 좋은 집에서 다시 태어나길 빌었다."
나는 아버지를 안아드리고 싶었으나, 엉거주춤 서서 손만 잡아드렸다. 노을이 비친 바다가 온통 벌겋게 타오르고, 울지 않는 매가 벽방산을 떠나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산행길잡이
안정사 입구에 대형 주차장이 있다. 안정사를 기점으로 한 원점회귀 산행이 일반적이다. 정상을 거쳐 안정재에서 하산하는 4.5km 코스이며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벽방산을 제대로 즐기려면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주파해 노산마을까지 가는 10km 코스를 타야 한다. 안정재에서 임도를 버리고 산길로 든다. 천개산은 경치가 없는 육산 정상이지만, 표지석과 평상, 통신사 기지국 철탑이 있다. 대당산은 별도의 표지석이나 시설이 없다. 부산의 골수산꾼 최남준씨가 걸어놓은 '준·희' 표지기에 대당산이라 적혀 있다. 통영지맥을 버리고 매바위 쪽으로 능선이 갈라지는 곳에 돌탑 전망터와 이정표가 있다. 통영지맥은 오른쪽 '한퇴(원동)' 방향이고, 매바위 쪽은 왼쪽 '노산마을' 방향이다. 이후로는 길찾기 쉽다. 시골 야산 같지만, 산길이 뚜렷하고 바위봉우리가 3곳 있다. 철계단이 놓여 있어 초보자도 쉽게 올라설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바위봉우리가 매바위이다. 멋진 소나무가 있고, 등산안내도에 현 위치 '매바위' 임을 알리는 지도가 있다. 안내도의 '매바위' 글자가 닳아서 뚜렷하게 식별하기 어렵다. 매바위에서 300m 더 가면 갈림길이다. 이정표의 '노산재 1.2km' 방향으로 가면 노산마을 등산로 입구에 닿는다. 차량 2~3대 세울 공간과 등산안내도, 먼지털이 시설이 있다. 벽방산 정상과 안정재 이후로는 발디딤 편한 흙길이 많다. 잔잔한 오르내림이 계속 이어지지만 경치 좋은 암봉들이 있어 지루하지 않다.
마니아들의 기념사진 명소인 선바위는 주능선에서 벗어나 있다. 별다른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찾아가기 쉽지 않다. 정상에서 안정재 방향으로 140m 가면 오른쪽으로 이어진 지능선길이 있다. 월평리로 이어진 산길이며 300m쯤 진행하면 오른쪽으로 선바위 방향의 희미한 산길이 있다. 산불방지 기간에도 산행 가능하다.
교통
통영종합버스터미널에서 안정사를 경유하는 버스(60, 661, 961)가 운행한다. 12km 거리이며 20~30분 걸린다. 노산마을에서 충훈교를 지나 300m를 이동해 광도초교 버스정류장에서 안정사행 버스를 탈 수 있다. 맞은편 차선에서 통영종합터미널행 버스를 탈 수 있다. 하산 후 콜택시를 부를 경우 9km 거리이며 요금 1만 원 정도 나온다. 통영택시 055-644-8000으로 연락하면 배차 가능하다. 현지 택시기사 말로는 '노산재실'이라고 하면, 노산리 하산지점을 기사들이 금방 이해한단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94/0000012535?cds=news_media_pc&type=editn
벽방산에 울리는 아버지의 초혼가 [마운틴 소설 벽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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